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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說

유죄 아니면 석방? 무죄 아니면 징역?

by betulo 2009.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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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가 말했다.

“배심원 여러분, 검찰은 피고가 유죄라는 어떠한 증거도 내놓지 못했습니다. ‘합리적 의심’에 입각해 판단해 주십시오.”

잠시 후 판사가 물었다.

“배심원단은 일치된 의견에 도달했습니까?”

배심원은 신중하게 하이라이트로 달려간다.

“매사추세츠 검찰 대 ㅇㅇㅇ사건은 … 유죄가 아닙니다(Not Guilty).”

‘보스턴 리걸’이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다. 나는 얼마 전부터 이 ‘미드’에 완전히 푹 빠졌다. 2004년 처음 시작해 2008년 시즌5까지 이어진 이 길고 긴 드라마는 보스턴에서 최고로 꼽히는 ‘크레인, 풀 & 슈미트’라는 로펌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이야기를 모은 법정드라마다.

 

이 드라마에서 백미는 형사사건에 나선 변호사들이 배심원단 앞에서 피고를 변호하며 토해내는 최종변론 장면이다. 특히 주인공 앨런 쇼어 변호사가 피고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달변을 뽐내는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할 지경이다. (앨런 쇼어 역은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로 1989년 깐느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배우 제임스 스패이더가 열연했다.)

앨런 쇼어 변호사가 배심원들 앞에서 항상 강조하는 게 있다. ‘합리적 의심’이다. 시즌3 마지막회에 보면 친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형제가 나온다. 앨런 쇼어와 그의 절친한 친구 데니 크레인 변호사가 한 명씩 변호를 맡았다. 두 변호사는 서로 상대방이 맡은 피고가 범인이라고 주장한다. 배심원단은 혼란에 빠진다. 그들은 결국 검찰이 ‘두 형제’를 공범으로 기소했지만 공범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된다. 두 형제는 석방된다.

드라마 한글자막은 언제나 배심원단이 ‘무죄’를 선고하는 것으로 번역하지만 실제 배심원단은 결코 피고에게 무죄를 선고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Not Guilty” 즉, ‘유죄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뿐이다. 유죄가 아니니 피고를 잡아가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피고를 피고로 삼은 경찰과 검찰에 내리는 준엄한 항의다.

‘보스턴 리걸’을 보면서 내가 정말 부러워하는 점은 유죄 여부를 입증해야 할 책임은 검찰에게 있다는 점이다. 만약 검찰이 유죄를 입증하지 못하거나 ‘합리적 의심’을 해소하지 못하면? 피고는 풀려난다. 심지어 기소과정에서 적법한 절차를 지키지 않았다면 위법하게 수집한 증거는 재판에서 배격한다는 원칙에 따라 본전도 못 건질 수 있다.

한 변호사가 내게 이런 말을 해 준 적이 있다. 피고인이 검찰에게 고문을 당했다면 이를 입증할 책임이 누구에게 있을까. 한국에선 검찰이 고문하지 않았단 사실을 입증하는게 아니라 피고인이 고문을 당했다는 걸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한 소비자운동가가 내게 말해줬다. “미국산 쇠고기 안전성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정부가 그토록 강조하는 글로벌 스탠다드에 따르면 “안전성을 입증하지 못했으면 위험”이다. 한국에선 “위험성을 입증하지 못했으니 안전”이다. 결국 “그거 먹고 죽은 사람 봤냐?”는 거다.

 

지난 3월18일 법원은 한미FTA문건을 유출했다는 혐의로 법정구속된 정창수 전 보좌관에 대해 항소를 기각했다. 그는 2007년 한미FTA와 관련 정부가 중요한 협상 목표로 제시하던 미국의 반덤핑제도 완화 등 무역구제안이 물 건너갔다는 정부문건을 유출했다.

국회 진상조사도 사법처리 대상이 아니라는 결론을 냈고 법원은 2007년 말 구속영장청구을 기각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9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항소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2부 조용준 부장판사는 비밀누설에 대해서는 뚜렷한 영향이 없다고 했는데도 항소기각으로 결론을 냈다.

나는 검찰에 묻고 싶다. 자신들이 주장한 ‘사전에 협상전략을 노출해 국민에게 막대한 피해를 줬다’는 기소사실을 입증했는가. 설마 협상전략을 노출하는 바람에 미국이 재협상을 요구하는 거라고 생각하는건가?

나는 법원에 묻고 싶다. 검찰이 주장한 내용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는 없는가. ‘보스턴 리걸’이 보여준 세계는 “유죄가 아니니 당신은 석방입니다.”라고 외친다. 내 주위에선 지금도 “당신이 무죄라는 걸 입증하지 못했으니 감옥에 가시오.”라고 소리친다. “닥치고 법질서 지키는게 좋‘읍’니다.”란 속삭임과 함께.

같은 제목으로 인권연대에 기고한 글(유죄 아니면 석방? 무죄 아니면 징역?) 중 일부 표현을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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