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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생각한다

인권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꾸기, 인권연대 25주년을 맞아

by betulo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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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꾸자.’ 인권연대의 사회적 역할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아닐까 싶다. 인권연대가 추구하는 목표는 물론 방법론까지도 이 한 문장에 응축돼 있다. 세상을 바꾸자. 어떻게? 인권을 기준으로. 인권연대가 25년 동안 벌여온 활동 또한 이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인권연대와 처음 만난 건 2003년 9월 무렵으로 기억한다. 개인으로서 인권연대와 인연을 맺은 지 21년이 되는 셈이다. 당시엔 인권실천시민연대란 이름으로 활동하던 인권연대는 당시 흔히 쓰던 다소 자조적인 표현으로 치면 전형적인 ‘등 단체’였다. 노무현 정부가 이라크에 파병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한국 사회가 들썩이던 때였다. 시민사회단체들이 흥사단 강당에 모여 이라크파병 반대운동을 의논하는 회의가 열었다. 

 어떤 중요한 사항을 결정해야 했는데 참가자들의 거수로 의견을 확인하는 표결로 하기로 의견이 모였다.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중요한 약점이 있는 방식이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시민사회단체의 총의라는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대표성을 부여받았다고 보기도 힘들었고, 한 단체에서 여러 사람이 참석하기도 했으니 표결 자체가 갖는 한계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서로 어지간히 다 아는 사이여서 그랬던건지 분위기에 휩쓸린거지, 혹은 달리 결론을 도출할 더 좋은 방법이 없었거나 전반적인 회의 분위기를 통해 대략적인 방향이 공유가 됐다고 본 건지 (다소 어설픈) 표결을 통해 결정이 내려졌다. 그런 와중에 어떤 낯선 참가자가 지극히 타당한 문제제기를 했지만 제대로 호응을 얻진 못했다.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모인 자리에 비춰보면 어딘가 낯설어 보였다. 큰 키에, 그보다 더 큰 덩치가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생각해보면 필자 눈에 비친 인권연대는 한국 시민사회단체에서 줄곧 그런 존재였다. 시민사회라는 공론장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이질적이고 뭔가 불편하게 하는 문제제기자였다. 모두가 그러려니 하는 지적을 하거나, 다들 신경 쓰지 못하는 지점을 꾸준히 제기했다. 2005년 즈음해서 제기했던 인권단체 위기론이 전자였다면 팔레스타인 인권상황을 위해 꾸준히 벌였던 집회, 경찰개혁과 검찰개혁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이 후자가 아닐까 싶다. 최근 이어가고 있는 오월걸상과 4월걸상은, 순전히 개인 의견을 전제로 말한다면 ‘평화의 소녀상’보다도 더 가치 있는 작업이 아닐까 싶다. 

 인권연대가 25년에 걸쳐 해온 많은 활동이 있다.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최근 활동보다는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해진, 하지만 지금도 큰 울림을 주는 예전 활동들을 중심으로 인권연대의 25년 활동을 부족하나마 복기(復棋)해보고자 한다. 

인권운동 위기론?

 인권연대는 노무현 정부 당시부터 인권운동 위기론을 여러 차례 밝혔다. 당시만 해도 나름대로 인권운동의 외연이 확산하던 때였기에 불만 섞인 반응도 적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2005년 당시 마련한 기획대담에선 인권단체 대부분이 5년이나 10년 안에 사라질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당시 문제제기를 되짚어보자.

 “거의 모든 조직이 회계감사를 비롯한 평가와 성찰 기능이 없어졌다. 그냥 앞으로 갈 뿐이다. 브레이크도 없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운동을 비판하면 불순한 책동으로 치부해 버린다. 내부 비판은 금기시하고 내부 성찰은 없는 사이 인권운동은 잡일에 시달리며 삼팔선은 혼자 지키고 있다. 지금 구조는 인권운동가를 소모시키고 고갈시키고 황폐하게 만든다. 바쁘기만 하고 남는 게 별로 없다. 나는 지금 인권운동이 위기라고 생각한다. 돌파구가 잘 안 보이는데도 운동가들 사이에 위기의식이 별로 없다. 지금 활동하는 인권단체 가운데 5년이나 10년 후에도 비전을 갖고 운동하는 단체가 몇이나 될지 의문이다.”


 특히 인권단체연석회의 해체를 주장한 게 예민했다. 그는 “한정된 역량을 지혜롭게 써야 한다”며 “인권단체가 단순히 전선운동을 지키는 투쟁 수단으로만 돼선 안 된다”고 밝혔다. 오창익 국장은 당시 대담에서 “본인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수없이 많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인권운동이 즉자적인 대응만 남발한다”며 대표적인 사례로 2004년 당시 국가보안법 철폐투쟁을 지목했다. 

 보도 이후 당시 많은 인권단체 관계자들이 불편한 혹은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지금도 이름만 대면 어지간히 알만한, 인권단체연석회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던 한 인권운동가는 “나는 (그런 진단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라고 짧게 말하며 전화를 끊어버렸던 기억이 난다. 그 뒤 연석회의가 어떻게 되었는지 떠올린다면 그때 좀 더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토론을 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비슷한 사례를 시민단체 기부금 문제에서도 찾을 수 있을 듯 하다. 시민단체는 기부금에 어떤 원칙을 가져야 하는가. 실용주의와 원칙주의 정도로 얘기할 수 있는 논쟁이 꽤 전개됐던 때가 있었다. 실용주의를 앞장서 주장했던 한 유명 시민운동가는 기부금 문제로 구속되는 수모를 겪었고, 원칙주의를 강조하던 한 유명 시민운동가는 정치권으로 가서 한때 대통령 후보 소리까지 들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과거형이다.

막상 그런 종류 논쟁에 크게 나서지 않았던 (혹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인권연대는 창립 시절부터 지금까지 정부 기부금이나 기업 기부금을 전혀 받고 있지 않다. 최근 인권연대 운영위원회에서는 중앙일보에서 제안한 ‘홍진기 창조인상’ 수상 제안을 토론 끝에 거절했다. 고백하건대 필자는 상을 받고 장발장은행 기금으로 사용하자는 쪽이었다. 하지만 인권연대 구성원들의 원칙적인 (혹은 보기에 따라선 답답한) 입장 지지가 다수였다. 

 시민사회 전반적인 분위기와 이질적인 문제제기로 북한인권 문제가 있다. 북한인권 문제는 21세기 즈음부터 보수주의를 표방한 시민단체들이 주도권을 잡은 의제였고, 특히 탈북자들이 베이징에서 대사관 담을 넘는 사건과 미국 정부의 ‘북한인권법’ 제정으로 본격적으로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곧 보수정당의 전매특허처럼 돼 버렸다. 급기야 현재 통일부는 간판만 통일부일 뿐 실제로는 북한인권(공격)부처럼 돼 버렸는데, 그래서 북한 인민들의 인권 증진에 눈곱만큼이라도 도움이 되는지 매우 의문이다. 그나마 대북방송(이라는 이름의 층간소음)과 대북전단지(라는 이름의 쓰레기 불법투기)를 안 하는 걸 다행으로 치부해야 하는 지경까지 왔다. 

 필자는 북한인권문제가 거론되던 초창기부터 다수 시민단체들이 이 문제를 거론하기 꺼렸던 것이 심각한 오류였다고 생각한다. 인권연대는 당시부터 북한인권문제에 대한 분명한 목소리를 냈다. 인권연대는 북한인권문제에 대해 극단론을 배제하는 게 우선이라고 강조했는데, 특히 ‘공화국에는 인권문제가 없다’는 극단과 ‘북한에만 인권문제 있다’는 극단을 지적했다. “체제붕괴론 뿐 아니라 ‘정부는 교류협력을 해야 하기 때문에 우정어린 조언조차 하지 말자’는 것도 극단이고, 정부는 가만있고 민간단체만 얘기해야 한다는 것도 극단이라는 지적이었다. 

 “인권이란 개념은 인류가 발견한 최고 상위개념이다. 인권은 평화와 생명을 모두 포함한다. 그걸 혼용하지 말아 달라. 평화체제가 왜 중요한가. 생존권적 인권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북한 인권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해보면 한반도 평화체제가 가장 중요한 전제라는 것이다. 평화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덜 원초적인 인권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실효성이 떨어진다. ‘공포로부터의 자유’라는 인권도 있다.”

팔레스타인, 재소자 인문학, 그리고 남영동

 인권연대는 국제연대운동도 등한시하지 않았다. 특히 최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민간인 피해 문제가 심각한 국제적 현안이 된 상황에서 인권연대가 20여년 전에 팔레스타인을 위해 벌였던 꾸준한 활동은 한국사회의 오래된 폐쇄성에 비춰보면 특기할만한 가치가 있다. 인권연대는 2004년 5월부터 매주 화요일 정오에 ‘화요캠페인-이스라엘은 학살을 중단하라! 팔레스타인에 평화와 인권을’이라는 긴 제목을 가진 캠페인을 100번이나 실시했다. 

인권연대라는 단체를, 시민단체로서 처음 접한 건 앞에서도 언급했던 시민사회단체 회의 직후인 2003년 늦가을쯤이었다. 정확한 날짜야 당연히 알 수 없다. 그래도 화요일이었다는 건 분명히 기억한다. 당시 인권연대가 매주 화요일 주한이스라엘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열었기 때문이다. 한 선배와 만나기로 했는데 마침 그날이 화요일이었고, 그 선배는 자신이 일하는 시민단체에서 여는 집회 끝나고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다. 자연스럽게 인권연대 사람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며 인사를 했다. 언제 생겼고 누가 어떤 일을 하는 단체인지도 알게 됐다. 

한국은 참 폐쇄적인 사회다. 섬보다 더한 섬이라 그런건지도 모르겠다. 국제문제에 참 관심도 없다. 많은 미국인들이 세계지도에서 미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제대로 모른다며 미국인들의 형편없는 지리 지식을 비웃는 얘기를 많이 듣는데, 그럴 때마다 묘한 느낌을 받는다. 내가 만나본 수많은 한국인들이 세계지도에서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정도 지리지식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가 누굴 나무라는 건지 모를 일이다. 심지어 대학 졸업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한국사회에서 나름대로 똑똑한 집단으로 평가받는 사람들한테서 “캐나다가 미국 서쪽에 있는지 남쪽에 있는지 헷갈린다”거나, “베트남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농담처럼 들리겠지만 100% 사실이다.)

그런 나라에서 팔레스타인이라니. 한국 사람 가운데 팔레스타인에 가보기라도 한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 것이며,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 의문인데, 그런 ‘낯선’ 사람들을 위해 매주 화요일마다 쉬지 않고 ‘화요캠페인-이스라엘은 학살을 중단하라! 팔레스타인에 평화와 인권을’이라는 긴 제목을 가진 캠페인을 한다고 하니 무척이나 낯설어 보였다. 그렇게 인권연대라는 단체와 알게 됐다.  

 화요캠페인은 2004년 5월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딱 100회를 맞는 2006년 4월 캠페인을 마무리했다. 이스라엘의 가혹한 점령통치와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민간인 피해가 국제뉴스를 장식하는 2024년에 당시 캠페인을 다룬 기사를 다시 읽어보면 이게 과연 20년 전에 쓴 게 맞는지 혼란스러울 정도다. 

화요캠페인을 떠올릴 때마다 뚜라를 생각하게 된다. 1988년 일어났던 8888항쟁 당시 학생운동가로서 활동했고, 탄압을 피해 1994년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한국에 입국한 뚜라는 당시 ‘버마행동’이라는 시민단체를 이끌고 있었다. 불법체류자 신분이라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 참 열심히 활동했다. 미얀마 ‘민주화’ 이후로는 고국으로 돌아가 가족도 이루고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군부 쿠데타 이후 다시 총을 잡고 밀림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뚜라 사령관’이라니.  

뚜라는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는 속에서도 팔레스타인 캠페인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당시 그가 했던 말을 옮겨본다. “한국은 잘 사는 나라입니다. 여러분이 좋은 땅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지금도 한국에서 멀지 않은 버마에서, 팔레스타인에서 누군가 고문당하고 박해받고 죽어가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 주십시오.” 

남영동보안분실과 인권연대

 인권연대가 했던 사업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성과 가운데 하나가 남영동 보안분실을 바꾼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사실 자체를 모른다. 어떤 면에선 그게 인권연대가 주도한 사업들의 전형적인 특징(?)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인권연대 25주년이라는 자리를 빌어, 남영동 보안분실을 바꾼 인권연대의 노력과 성취를 거론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지난 2021년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제34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과 함께 민주인권기념관 착공식이 열렸다. 이곳을 시민에게 되돌려주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생각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다는 데 싫어할 이유가 없다. 민주인권기념관은, 기억하는 방식 때문에 솔직히 불편했다. 기념관 홈페이지에는 “2005년 8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남영동 대공분실 ‘민주인권교육센터’ 활용계획 경찰청에 제안”이라고 돼 있다. 마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시종일관 열심히 노력한 성과라도 되는 듯 강조하는 것 같다. 

 인권연대와 대한성공회 주축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을 국민에게’ 캠페인을 시작했던 게 2005년 6월이었다. 추진위원회를 발족했고 경찰청장을 면담해 취지를 설명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는 당시 경찰청장, 허준영의 반응이었다. 캠페인이 어느 정도 진행된 다음에야 경찰이 마지못해 수락하는 그림을 예상했는데, 남영동 대공분실을 경찰회관으로 만드는 방안을 고민하던 경찰청은 캠페인 취지를 전해 듣고는 무척 신속하게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해 7월에는 남영동 대공분실을 인권기념관으로 바꾼다며 공동기자회견도 했고, 10월에는 대공분실 앞마당에서 인권경찰 비전 선포식까지 했다. 2018년 경찰청은 남영동 대공분실을 기념사업회로 이관했다. 앞으로 민주인권기념관을 세우고 운영하는 건 기념사업회 몫이다. 한 가지는 꼭 얘기하고 싶다. 민주인권기념관이 기념해야 할 대상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권’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시작에 있었던 게 인권연대라는 건 솔직히 밝혀주길 바란다. 

<뱀다리[蛇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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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연대 창립 25주년을 기념해 열린 심포지엄을 위해 작성한 발표문을 일부 수정보완한 글이다. 발표문은 인권연대를 주제로 과거에 썼던 여러 글을 바탕으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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