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제보자는 배신자 소리가 아니라 의무이행자 소리를 들어야 한다.”
1990년 감사원 감사비리를 고발했다 파면당했던 이문옥 전 감사관. 그 사건은 그의 인생을 바꿔 버렸다.
“당시는 ‘회사는 망해도 사장은 망하지 않는다’ ‘땅만 있어도 망하진 않는다’는 말이 유행하던 때였죠. 정부에선 한달이 멀다 하고 부동산 투기 억제대책을 내놓았지만 효과가 없었구요. 재벌 계열 기업체 23개를 선정해 조사했더니 비업무용 부동산 보유비율이 43%나 됐습니다. 재벌이 부동산투기 주범이나 마찬가지였죠. 그런데 갑자기 감사를 중단하라는 지시가 내려온 거예요. 들어보니 당시 이종기 중앙일보 부회장이 감사원 사무총장을 만났다고 합니다. 결국 감사를 중단하고 보고서 낼 수밖에 없었다.” 이종기씨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매형이고 X파일 녹음에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과 대화를 나누는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해 금융감독원에서 비업무용부동산 비율이 1.2%라고 보고했는데 이씨가 조사한 결과는 43%였다. 이씨는 감사결과를 한겨레신문에 제보했고 한겨레신문은 1990년 5월 이 사실을 보도했다. “재벌이 로비해서 감사원 감사를 중단시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사태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족과 동료만 생각했으면 못했겠죠. 죽을 각오 하고 한 일이었습니다.”
감사원은 잘못을 시인하는 각서와 사표를 종용했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이씨가 허위사실을 언론에 유포해 정부의 공신력을 떨어뜨렸다는 이유로 공무상 비밀누설죄로 구속했다. 파면 처분을 당한 이씨는 이후 6년 동안 법정투쟁을 벌인 끝에 1996년 4월 대법원에서 무죄확정판결을 받았고 그해 10월에는 파면처분청구소송에서도 승소해 복직할 수 있었다. 그는 감사교육원 교수로 근무하다 1999년 정년퇴직했다.
그는 공익제보를 한 이후 “전화가 뚝 끊겼다”며 “사회에서 고립됐다는 외로움이 가장 괴로운 일”이라고 강조한다. 다 기억한다. 그는 “나와 가까이 지내면 피해본다고 생각한 것 같다”며 “통화라도 하면 도청당한다고 믿으니 어느 누가 선뜻 전화를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금융기관에 융자신청 서류 내면 이문옥 이름 석 자만 보고 바로 퇴짜 당했습니다. 전염병 환자 대우를 받듯이 사회에서 격리돼 버립니다. 그리고 스스로 위축되기 쉽죠. 나같은 경우는 오히려 더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고 시민단체 활동도 열심히 했으니 약간은 특이한 경우이지요.”
구속 60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 난 이씨는 구치소에서 내부고발자를 보호하기 위한 미국의 제도를 소개하는 칼럼을 읽게 된다. “눈이 번쩍 트이더라구요. 경실련 경제부정고발센터 대표와 양심선언자모임 회장을 하면서 양심선언자보호특별법 제정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부패방지법 제정운동으로 이어졌지요. 사람들은 무모하다고 했지만 세상이 바뀌면 나는 언제든 구제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부패방지법을 만들지도 못했는데 정년퇴직한다고 정부에서 주는 녹조근조훈장을 어떻게 받나 싶어 훈장수여도 거절했지요.”
정년퇴직하고 나서는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부정부패로 피해받는 사람은 서민대중이고 잘사는 사람은 부패로 덕본다는데 생각이 미치니 서민을 대변하는 정당이 절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노조와 손잡으면 부패추방운동을 더 활발하게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작용했다. 그는 2002년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해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10년에 걸친 노력은 결국 부패방지법이 2002년 국회를 통과하면서 결실을 맺었다. 그는 “부족한 게 많은 법이긴 하지만 제정과 개정을 거쳐 조금씩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부패방지법이 부패추방을 위한 실질적인 힘을 가지려면 공익제보 대상을 기업과 민간단체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업 분식회계는 곧바로 탈세로 이어집니다. 결국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이 입게 되지요. 사립학교재단의 부정과 비리도 결국 피해자는 국민 전체입니다. 부패방지가 전 사회적으로 녹아들어가려면 기업 내부고발이나 사학재단 내부고발도 법적으로 보호해줘야 하지요. 물론 감사원 독립도 중요하구요. 공무원노조의 책임도 큽니다.”
강국진 기자 globalngo@ngotime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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