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비평] 사회적맥락 고려 채무자 끌어안은 대법원
“마른 수건을 아무리 쥐어짜도 물은 나오지 않는다”
참여연대-시민의신문 공동기획
2006/11/15
지난 9월 22일 대법원 제2부는 빚을 갚을 능력이 전혀 없어 법원에 파산선고를 하고 면책신청을 한 국민기초생활보호대상자에게 빚 일부를 면책해 준 항소심 판단과 달리 전부면책을 해 주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만성적인 신장질환과 당뇨병으로 직장도 없이 노모와 어린 두 자녀까지 부양해야 하는 처지였던 원고는 돈을 꾸거나 현금서비스로 생활하다 결국 카드깡과 돌려막기로 이자를 변제하기에 이르렀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파산에 이르게 되자 법원에 파산면책신청을 했다. (구)파산법에서는 갚을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카드깡이나 돌려막기를 할 경우는 면책불허사유에 해당했다. 그러나 법원은 신청자의 사정을 고려해 법관 재량으로 일부 면책을 해주기도 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통상 해오던 일부면책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신청인의 사정을 적극적으로 고려해 채무 전부를 면책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전문가들은 대법원 결정이 ‘재량면책과 관련한 기준을 제시하면서도 개인파산제도의 근본 목적을 잊지 않았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결정이라고 평가한다. 그럼에도 판결문에서 소득능력을 중요하게 언급함으로써 조금이라도 소득이 있는 경우 면책대상에서 제외해야 하는가라는 논란을 예고한다. 일부에선 면책결정을 남용할 경우 도덕적해이와 악의적 파산신청이 늘 것을 우려하기도 한다.
<시민의신문>과 참여연대는 ‘시민포럼-법정 밖에서 본 판결’ 열 번째 주제로 극빈자의 빚을 전부면책해주도록 결정한 대법원 판결(대법원 2006마600)을 통해 개인파산제도와 서민부채 문제를 다룬다. <편집자주>
○일시 : 2006년 11월 13일(월) 오후 7시 30분
○장소 : 참여연대 2층 강당
○좌담회 사회자: 한상희(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소장),
○좌담회 참석자 :
권정순 변호사(참여연대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 실행위원)
정의철 신용회복연구소장
임동현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 국장
△한상희: 오늘 다루고자 하는 판결은 채무 발생에 있어서 개인 귀책이 있을 경우 면책인정을 상당히 까다롭게 하는 판결 흐름과는 다른 경우다. 그냥 내버려둘 경우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있을 경우에는 개인면책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는 결정은 법원이 개인의 생계 안정 보장을 고려했다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권정순: 개인파산제도는 간단히 말해 자기 재산으로 빚을 도저히 갚을 수 없을 때 법원이 파산선고와 면책결정을 통해 채무를 탕감해주는 것이다. 법률상으로 엄격히 해석하면 과도한 낭비, 지나친 사행, 재산은닉 같은 면책불허사유가 없으면 면책결정을 해 줘야 한다.
△정의철: 우리가 파악하기에 예비신용불량자까지 합해 신용불량자는 거의 1천만명에 달한다. 예비파산자는 200만에 달하는 것으로 계산한다.
△한: 사정이 이러하면 이는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고 사회불안요인도 있을 것 같다. 신용불량자가 늘어나는 원인은 무엇일까.
△임동현: 세 가지가 있다. 먼저 정부가 1998년 이전에 유지했던 이자제한법을 폐지하고 카드부양책을 쓰면서 카드회사가 마구잡이로 카드발급에 나섰다. 외환위기 이후 저소득층 가구도 급증했다.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서민들의 가계대출이 급증했다. 2000년 이후 대출받아 전월세 들었다가 파산하는 경우도 많이 생겼다. 문제는 정부가 정책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부는 시장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사실상 워크아웃과 배드뱅크라는 사적 구제제도만 2004년까지 유지했다. 지금도 정부는 소극적 대책에 그치고 있다.
△권: 한국에서 파산법은 1960년대 도입했지만 개인파산자가 처음 나온 건 외환위기 당시였다. 처음엔 나도 채권·채무는 개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담을 하면서 이는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상황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채무자 만나서 상담해보면 당연히 느낄 수밖에 없는 사회적 모순이 존재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빚이 1억원이나 되는 부부가 있었다. 전세에서 시작했다가 지금은 월세 보증금 5백만원만 남아있다. 아들은 대학등록금이 없어 군대갔다. 부부가 일해서 한달에 3백만원 버는데 그 중 250만원을 이자 갚는데 써야 한다. 원금은 전혀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현금서비스 이율만 30% 가까이 될 정도로 금리가 높다. 빚 1천만원이 2년 반만에 2천만원이 된다는 거다. 독촉도 심하게 받는다. 채무를 갚으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수렁에 빠져든다.
△정: 외환위기 이전에는 채무 때문에 파산한다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 지금은 6월 한달에만 1만명이 넘게 채무불이행 신청을 했다. 원인으로는 병원비 지출이 제일 많고 그 다음이 사업실패 등이다. 서민들은 경제활동을 통해 소득을 창출해야 하는데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는 대처할 방법이 없다. 외환위기는 서민들에게 치명타였다. 신용카드 정책도 서민들을 고려하지 않았다. 거리에서 카드발급할 지경이었고 카드를 사용하면 환급해준다는 정책도 나왔다. 정부가 국민들을 카드에 의존하게 내몰았다. 후유증은 고스란히 서민들이 떠안았다.
△임: 정부는 채무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지적했지만 채권자 도덕적 해이는 거론하지 않는다. 민주노동당이 2002년에 입수한 금융감독원 자료를 보면 신용회복위원회라는 민간기구가 이미 은행연합회 카드회사 등 채권자 중심이기 때문에 공정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럼에도 정부는 그걸 덮어버렸다.
한국은 이미 신용사회, 하지만 안전망은 부실
△권: 우리 사회는 이미 신용사회로 들어섰다. 그것은 그야말로 외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라는 것이다. 채무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신용카드가 대표적이다. 신용을 담보로 하는 사회에서 질병이나 실업 등 예상밖 상황을 맞으면 채무가 늘어나게 된다. 가중채무자가 생기는 게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국도 최근 엄격해지는 추세이긴 하지만 1년에 160만명이 넘는 사람이 보호를 받는다. 한국 채무자가 특별히 염치가 없어서 파산법이 생긴 게 아니다. 한번 실패를 영원한 실패로 규정하지 않는 사회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법이다. 그 법에 따라 채무자들은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정: 문제는 신용사회에 따른 사회적 안전망이다. 캐나다는 1/3원칙이란 게 있다. 예기치 않게 부채가 생기면 파산을 하기 전에 연체의 1/3을 어떻게 상환할 것인가를 상담받는 사회적 시스템이다. 캐나다나 미국의 파산자와 한국 파산자는 너무나 다르다. 한국 카드회사는 채무자에게 무조건 다 갚으라고 윽박지른다. 완충장치가 없다.
제한 없는 이자, 대부업체 배만 불린다
△임: 신용상태가 안좋은 이들이 카드돌려막기를 하다가 안 되면 결국 미등록대부업체에 간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사채를 이용하는 사람이 4백만명 가량된다. 개인간 거래는 이자율을 제한하는 법조차 없다. 미국도 처음 신용카드가 생겼을 때는 우편으로 신용카드를 배달해 줬다고 한다. 일본은 심지어 대부업체가 신용카드를 발급했다. 그러다 신용불량자가 폭증하니까 법제도로 갱생할 수 있는 지원시스템을 만든 거다. 한국도 채권자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공적 채무조정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사적채무조정도 활성화된다. 우리나라는 사적채무조정만 있고 공적채무조정이 미흡하다.
△한: 사회적 맥락을 살펴봤다. 그럼 이번 판결의 의미는 무엇일까.
△권: 가중채무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한다면 거기서 벗어나도록 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가중채무를 면책해주도록 한다. 이럴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카드깡과 카드 돌려막기다. 이는 분명 위법행위다. 하지만 법을 현실과 떨어뜨려놓고 생각해선 안 된다. 파산제도 목적이 가중채무자의 경제적 재생을 도모하는 것이라면 채무자 대부분이 경험한 것을 이유로 면책을 불허한다면 결국 채무변제가 남아있게 되고 이는 입법취지가 사라지게 된다. 그런 고민 끝에 법원은 여러 가지 사정을 판단해서 예외적으로 일부나 전부 면책을 허용해왔다. 지난 4월부터 시행하는 ‘채무자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도 이를 명문화했다. 이번 판결을 살펴보면 대법원은 개인파산제도의 근본 목적에 돌아가 판결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정: 빚만 없어진다고 경제적 재생이 되는 게 아니다. 사회권과 사회적 경제를 지향하는 것이 헌법정신이다. 이번 경우 애초 하급심은 70% 면책결정을 했지만 30% 빚 때문에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개인파산제도는 도덕 문제가 아니다
△한: 사회안전망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가 경우에 따라 개인의 경제적 파산을 일으킨다는 게 안타깝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 이런 제도를 악용할 우려가 있지 않을까. 그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
△권: 작년에 전국 법원에 약 3만8천명이 파산신청했다. 올해는 7월까지 이미 7만명이 파산절차를 이용하고 있다. 보수언론에선 벌써부터 서민금융기관 도산우려 얘기가 나온다. 내가 보기에 개인파산제도를 악용할 소지는 통상 어떤 제도에나 해당하는 정도다. 개인파산제도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법원에서 엄격한 심사를 거친다. 면책불허사유 심사도 그렇다. 막연하게 도덕적해이를 말할 게 아니다. 파산제도 운영과 관련해 법원이 문제가 되는 것은 따로 있다. 법원에 따라, 판사에 따라 결정에 편차가 크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주소를 일부러 옮긴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법원신뢰를 위해 법원이 시정을 해야 한다.
또다른 논쟁꺼리가 있다. 이번 판결은 채무자가 건강 때문에 직업으로 인한 수익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수익을 예상할 수 있다면 일부면책이 타당한가. 법률전문가 사이에서는 이 판례로 인해 오히려 수입이 있을 경우 개인파산이 아니라 개인회생이 활성화될 것이라고 말한다. 한달 수입이 80만원인데 채무는 4천만원이나 되는 미혼 여성이 있다. 생활이 불가능한 수준이다. 나는 파산신청을 해서 면책을 받으라고 권유했다. 서울의 어떤 법원은 이런 경우 개인회생을 권유한다는 얘길 들었다.
△한: 개인파산제도와 관련해 어떤 이는 면책 대신에 사회봉사를 시키자는 의견을 제기하더라. 어떻게 생각하나.
△권: 채권·채무를 도덕이나 윤리 문제로 보는 건 맥을 잘못 짚었다. 채권·채무는 개인간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다. 기본적으로 채권금융기관이 존립이유와 똑같이 채무자들도 이익에 부합하게 행동한다. 마른 수건을 아무리 짜도 물이 나오진 않는다. 채무탕감은 호의를 받는 게 아니다. 법원의 면책결정으로 채권자는 언뜻 본인의 채권을 잃은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본래 그 채권은 경제적 가치가 없었던 것임을 감안한다면 실질적인 손해는 발생하지 않은 게 된다. 누구나 예측불가능한 상황에서 신용문제에 닥칠 수 있다. 채무자들의 도덕적 해이라는 것만 강조하니까 채무자들은 양심에 눌리게 된다. 파산을 도덕과 윤리 문제로 인식하는 사회적 편견을 깨야 한다.
△임: 농경제 공동체 사회라면 인간적 신뢰관계가 중요하다. 지금은 그런 사회가 아니다. 봉사활동이란 얘기는 몇몇 은행들이 가중채무자들에게 사회봉사시키고 일당 계산해서 이자를 일부 갚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건 도덕과는 다른 문제다.
△한: 공동체사회가 무너지고 자본주의 사회 접어들면서 채무,신용불량,파산 등 문제가 많이 생겼다. 구조적인 빈곤에서 강요되는 게 아니어야 한다. 지금까지 나온 의견을 하나로 수렴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파산제도는 도덕이나 윤리가 아니라 자본주의 작동원리에서 나오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인간다운 생활을 실현할 수 있도록 법이 무엇을 할 것인가, 사회가 무엇을 할 것인가 등을 고려해야 한다. 그게 우리 숙제고 정치권의 숙제다.
2006년 11월 14일 오후 12시 11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시민의신문 제 676호 14면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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