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청계)천변풍경,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것들

雜說

by betulo 2024. 10. 2. 18:23

본문

728x90

  일요일 아침 광화문역에서 밖으로 나오니 예배를 한다며 엄청나게 많은 엠프를 설치한 무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예배가 시작되면, 시끄럽다. 무슨 얘길 하는지 잘 들리질 않는다. 뭔가 떠든다는 건 알겠는데 목소리는 꽥꽥거리고 동시통역사까지 불러서 함께 떠들어대니 뭔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하긴,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는 게 조금이라도 속이 덜 터지긴 하겠다. 고래고래 몇 시간 동안 쉴새 없이 떠드는 통에 하늘에 계신 (저들의) 아버지는 안식일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겠구나. 안쓰럽다. 역시 자식 농사는 잘 짓고 볼 일이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지날 때는 시도 때도 없이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사람들을 협박하며 대단한 비밀이라도 알려준다는 듯 개똥철학을 늘어놓는 분들 때문에 정신이 혼미하다. 목소리는 또 얼마나 크고 카랑카랑한지. 자기가 좋아하는 예수 자랑만 하면 그나마 낫겠는데 꼭 자기가 싫어하는 석가모니 흉까지 보는 것도 민망한 노릇이다. 괜히 귀라도 후비적거리며 신호등만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신호가 바뀌면 재빨리 지옥의 손길에서 벗어나는 게 상책이다.

  청계광장에선 몇 년째 코로나19 백신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수천명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며 농성하는 큼지막한 천막 앞을 지나가야 한다. 코로나19 백신을 맞은 사람이 한국에서만 수천만명인데 백신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게 의아한 노릇이다. 한켠에는 백신 자체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얘기도 등장하는데 몇 년 전에 크게 논란이 됐던 ‘안아키’(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를 떠올리게 한다.

  청계광장을 지나 파이낸스센터 앞을 지날 때는 수십미터에 걸쳐 철근으로 고정해놓은 사진 수십장이 놓여 있고 그 위로 여러 나라 국기가 펄럭인다. 그 많은 국기들이 비를 맞아 쭈글쭈글해진 걸 본 적도 여러번이다. 남의 나라에서 풍찬노숙하느라 참 고생이 많다. 사진들이란 한국전쟁 당시 미군과 유엔군, 이승만의 영웅적인 활약상과 조선인민군을 비롯한 공산군의 잔악상 뭐 그런 내용이다.

  새로울 건 하나도 없다. 이미 초중고에서 지겹도록 배웠던 것들이다. 최신연구성과나 최신 발굴 사진은 물론 전혀 없다. 이 사진들 무리는 박근혜 탄핵 이후 조용히 사라졌다가 5년만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3년째 저 자리에 그대로 있다. 굳이 말한다면 통행을 방해하는 야외전시인데, 관공서 허가를 안 받았다는데 내 돈 500원 걸겠다.

  퇴근해서 광화문역을 향하면 어김없이 결기로 가득찬 무리와 마주친다. 마이크를 잡은 사람은 자신들이 떠받드는 목사 정명석을 위해 목소리를 높인다. 정명석은 억울하다, 정명석을 음해하는 방송은 허위 조작이니 믿지 마라, 정명석은 훌륭한 분이다 뭐 그런 얘길 끊임없이 주절주절 한다. 전부 듣고 싶지 않은 얘기다. 우리나라 대다수 목사들이 성경 말씀을 제대로 해석할 줄도 모른다거나 제대로 해석해주질 않는다는 얘기도 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 없다. 들리는 건 어쩔 수 없더라도 눈길이라도 피해야겠다. 일부러 고개를 돌려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 억지로 전단지를 쥐어줄까 싶어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는 것도 잊으면 안된다. 내 정신줄은 소중하니까. 

  그 모든 소음 중에서도 압권은 전투기 소음이다. 요즘 국군의날을 기념해 각종 첨단무기를 동원한 시가행진을 한다고 공군 전투기들이 광화문광장 주변을 날아다닌다. 전투기 엔진 소리에 비하면 목사들 고래고래는 갓난아기들 잠자는 소리에 불과하다. 국군의날 시가행진은 1956년부터 1978년까진 해마다 했지만 1979년부터 1990년까진 3년에 한번씩, 1993년부터는 5년에 한 번씩 열렸다. 2013년에 하고 나서 2018년엔 하지도 않았다가 10년 만인 지난해 열렸다. 2년 연속 하는 건 박정희 때 이후 처음이다.

  고위력탄도미사일 현무-5도 공개한다는데 그렇게 무시무시하고 강력한 무기라면 동네방네 자랑하지 말고 꽁꽁 숨겨놓는게 국가안보를 위해 더 좋은 것 아닌가 싶다. 주한미군도 함께 행진한다는데 주최측에선 한미동맹 과시하는 게 자랑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외국인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도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하긴 국군의날 행사이니 작전권 가진 분들이 참석하는 게 명실상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군대 안 갔다 온 대통령은 첨단무기 날아다니고 굴러다니면 눈이 즐겁고 엔돌핀이 팍팍 분출할지 모르겠지만 병장 만기제대한 개구리 처지에서 보면 후배 장병들이 얼마나 고생이 많을까 안쓰럽다는 생각부터 든다. 이거 준비한다고 작년에 103억원, 올해 80억원을 쓰고, 행사 준비하다가 장병 두 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해병대1사단이 대민지원한다고 설레발쳤던 것과 국군의날 무력시위한다고 몇달간 뺑뺑이 굴리는 게 뭐가 다른지도 모르겠다. 10월 1일엔 광화문 주변엔 얼씬도 말아야겠다. 내 눈과 귀는 소중하니까.

  광화문 주변은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것들로 가득차 있다. 몇 분 걷는 것만으로도 정신사납다. 뭔가 꽉꽉 채우지 말고 비우는 쪽으로 고민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광화문광장이다. 동상 두 개 빼고는 나무와 의자 뿐이어서 북악산 너머 구름에 걸린 북한산을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서울시에선 최근에 광화문광장에 엄청나게 큰 국기게양대를 세우겠다고 했다가 욕만 얻어먹고 꼬리를 내렸다는 소식이 들린다. 언제 또 무슨 괴상망측한 걸 아이디어랍시고 내놓을까 싶어 무서워진다.

#인권연대에 기고한 글입니다. 

'雜說'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리안, 두리안을 먹어봤다  (1) 2024.09.23
지역신문은 지속가능한가  (0) 2024.07.02
2024년을 앞두고 詩 한 수 읊어봤다  (0) 2023.12.27
국가유공자 유족으로 산다는 것  (0) 2023.03.07
역사에 공짜는 없다  (0) 2023.02.26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