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같으면 벌써 폭동 일어났을 것” |
[르포]미군기지 소음피해 소송 준비하는 황구지리 |
주민들 ‘생명줄’ 뺏길판에 ‘주름살’ 가득 |
밀어붙이기 미군기지 확장에 국가배상 소송 ‘맞불’ |
2004/2/6 |
강국진 globalngo@ngotimes.net |
지난 1965년 평택시 황구지리에 살던 백흥찬씨(당시 34세)가 마차를 타고 제방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송탄기지(K-55)에서 전투기가 갑자기 이륙했다. 전투기가 내는 굉음에 놀란 소가 펄쩍 뛰기 시작했다. 백씨와 마차는 제방 아래로 굴러 떨어졌고 백씨는 마차에 깔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배상은 없었다. 입에 발린 사과 한마디도 없었다. 마을 바로 옆으로 전투기가 추락하고 미군기지에서 나오는 폐유와 하수가 땅에 스며들어 지하수를 먹을 수 없게 되어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미군기지 만든다는 이유로 살던 집에서 쫓겨난 사람들 누구도 항의한번 제대로 못했다. 전투기 편대가 저공비행하면 안테나가 흔들려 텔레비전을 볼 수가 없다는 곳. 황구지리 주민들은 이제는 못참겠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달 27일 군산 미공군기지 소음피해를 국가가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온 것도 주민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황구지리 앞으로 펼쳐진 농토. 농민들의 생명줄인 이 들판이 모두 미군기지 확장 예정
지난 4일 찾아간 황구지리 노인정. 마을 노인들 10여명이 앉아있다. 그들의 첫인상은? 시끄럽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싸움이라도 벌이는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마을 노인들 대부분이 한쪽 귀를 못쓴다. 소리가 제대로 안들리니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이다. 마을 위로는 미군비행기가 낮이고 새벽이고 시도 때도 없이 오르내린다. 할아버지 한 분은 “미군 전투기가 한꺼번에 이륙하면 간이 다 흔들린다”고 말한다. 이착륙이 없어도 밤에는 비행기 정비하는 소리가 잠을 깨운다. 한국전쟁 기간인 1952년 마을 옆에 미군 공군기지가 들어선 이후 황구지리는 이래저래 “50년을 시끄러운 마을”이다.
황구지리 노인정에서 만난 이들은 하나같이 한쪽 귀가 안들린다 마을 노인들은 ‘비행기 박사’들이다. 비행기 소리만 들어도 F-16인지 A-10인지 기종을 척척 맞춘다. 기자는 예전엔 바람방향에 따라 이륙할 활주로 방향을 정했다는 것도, A-10이 대전차전투기라는 것도, F-16이 이륙하고 나서 어떻게 선회비행을 하는지도 모두 황구지리 노인들한테 처음 들었다.
황구지리는 논농사를 위주로 하는 지역이다. 마을 앞으로 펼쳐진 70만여평의 논은 마을 주민들이 생명처럼 가꿔온 농토였다. 그 너른 들판 바로 옆으로 송탄기지가 이어진다. 주민들은 미군 전투기가 이륙할 때 나는 굉음을 들으며 일을 해야 한다. 시간이라도 정해져 있으면 미리 마음의 준비라도 하겠지만 미군은 그런 것도 없다.
그런식으로 50년을 지내다보니 마을 노인들 대부분은 청력장애에 시달리게 되었다. 한상렬씨(69세)는 “마을 아주머니 한 명이 5년전에 미군 전투기 편대비행하는 소리 때문에 고막이 터졌다”고 일러주기도 했다. 그는 “한번은 논에서 일하다가 비행기 소리에 놀라 기절한 적도 있다”며 허허 웃는다. 가축으로 키우던 소가 유산하는 사고도 계속 생겼다. 논일을 하던 주민 한 명은 미군전투기 굉음에 놀란 소가 날뛰는 바람에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다.
“제발 편하게 잠좀 자자”
평택시는 주민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2002년 12월부터 지난해 말까지 송탄기지와 팽성기지(K-6, 캠프 험프리) 주변의 소음과 진동을 조사했다. 지난 6일 용업업체가 실시한 ‘항공기 소음,진동조사 용역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황구지리는 국내항공법에서 정하고 잇는 소음대책지역(80데시벨 이상)에 속한다. 신용조 황구지리 이장(아래 사진)은 “주민들이 체감하는 것보다는 결과가 훨씬 경미하게 나왔다”고 말하면서도 “이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기지주변의 다른 곳과 함께 국가를 상대로 소음피해청구소송을 낼 것”이라고 밝혔다.
노인정에서 얘기를 듣는 중에 비행기 한 대가 마을 위로 지나간다. 그 소리도 사실 작은 소리가 아니지만 이종화씨(78세)는 “뭘 이정도 갖고 놀라느냐”며 기자를 놀린다. 그는 “이상하게 오늘따라 잠잠하다”며 “미군들이 취재에 대비해 일부러 비행기 안띄우는 거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그나마 그동안은 논을 사이로 해서 송탄기지와 마을이 1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었다. 농업기반공사는 3년전에 3천평당 2천만원을 들여 경지정리사업을 했다. 5억원 가까운 돈을 들여 경지정리사업 해놓은 논을 모조리 기지로 만드는 셈이다. 그런데 송탄기지를 확장해 35만평을 마을 턱밑까지 확장한다.
마을 주민들의 ‘생명줄’인 논도 모조리 내놓아야 한다. 2백여명 주민의 80% 가량이 60세 이상 노인인 황구지리의 민심은 나날이 정부와 지자체, 미군에 싸늘해진다.
황구지리 노인회장 황영성씨(73세)는 “미군기지 확장하면 마을 바로 앞까지 기지가 들어서는 셈”이라며 “지금도 시끄러워 죽겠는데 얼마나 더 시끄러워지겠느냐”고 말했다. 다른 마을 노인들도 모두들 그 말에 동조하며 “미군 비행기 소리는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 “제발 잠 좀 편하게 자자”고 한마디씩 거들었다. 가만히 얘기만 듣던 한 노인은 “서울 같았으면 벌써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미군기지 이전, ‘참여’는 없었다
이들이 무엇보다도 불만으로 삼는 것은 정부와 지자체가 보여주는 무성의한 태도다. 황영성 노인회장은 “국회나 정치권에서 이제껏 조사 한번 나온적 없다”며 “생명같은 농토를 뺏어가는데 왜 설명해주는 공무원 한명이 없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지난달 26일 국방부장관 면담을 신청했는데 ‘주민의견을 충분히 들었기 때문에 만날 이유가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면서 “왜 떳떳하게 말을 못하느냐. 촌놈이라고 무시하는거냐”고 분개했다.
확장 예정지를 따라 주민들이 세워놓은 깃발들이 바람에 나부낀다 . 신용조 이장은 “용산사업단 실무책임자라는 중령이 토지매입을 위해 찾아와서는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이 했다”며 “‘불만있으면 소송 제기하라’고 말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평택 경찰서에는 미군기지와 관련한 주민들의 동향을 보고하라는 요구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기자들이 취재오면 누구를 만났고 무얼 물었다는 것까지 캐묻는다”고 일러줬다.
황구지리에도 한국전쟁 참전 경험이 있는 노인들이 있다. 그들조차 “자기나라 위해서 미군이 있는거 아니냐”고 말한다. 국가가 하는 일에 순종하고 미국은 영원한 맹방이라고 믿도록 끊임없이 강요받았던 한국의 전쟁경험세대가 대부분인 황구지리. 50년 넘게 이어온 소음피해와 턱밑까지 밀려오는 미군기지 확장이 순박한 농민들을 바꿔놓고 있다. 아니, 생존권이 걸린 문제에 대해 누구하나 찾아와 설명한번 안하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미군기지 확장․이전이 농사짓는 일만 생각하던 농민들을 투사로 바꿔놓고 있다. 이제 이들은 미군기지 이전의 당위성과 지역개발을 믿지 않는다.
미군기지 확장 결정에 ‘참여’는 없었다. 이제 주민들 스스로 ‘참여’해 정부의 막무가내 밀어붙이기와 미국의 세계전략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 신용조 이장은 “2월 중으로 소음피해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할 것이며 승산이 충분하다”고 밝혔다. 미군기지 이전에 대해서도 “우리를 그렇게 무시하는 정부관료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두고 보라”고 자신했다. 강국진 기자 sechenkhan@ngotimes.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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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2월 6일 오전 2시 29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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