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의 누] (2005, 김대승)라는 영화를 꽤 좋아한다. 사극 느낌이 나는 설정 속에 노무현 정부 당시 한창 논쟁이던 과거사 청산 문제에 대한 은유를 잔뜩 집어넣었는데 생각할 거리가 꽤 많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건 결말 즈음해서 마을 사람들이 “이게 다 너 때문이야”를 외치며 불행한 사태의 원흉에게 개떼처럼 몰려들던 장면이었다.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마음에 평안을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장면을 지켜보는 내 눈엔 말 그대로 개탄과 혐오 그 자체였을 뿐이다.
책임을 누군가에게 혹은 무언가 에게 떠넘기는 건 동서고금을 통틀어 인간들의 오래된 행태다. 갓난아기가 아프다고 애꿎은 책상 모서리를 “때찌” 때리는 시늉하는 것부터 시작해 죄 없는 어린 양을 잡아 죽이거나, 심지어 다른 부족을 공격해 희생제물 용도로 부족민들을 납치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특히나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로 전 세계가 전전긍긍하는 요즘 같은 재난과 위기 국면에선 이런 못된 버릇이 제대로 도진다.
코로나19 이후 중국인 입국금지 요구가 그칠 줄 모른다. 사실 새누리당의 후신인 어떤 야당만 그런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다. 감염병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설왕설래가 있었다. 가령 대한의사협회는 2월 3일 입장문에서 “더 늦기 전에 위험지역을 중국 전역으로 확대해 전방위적인 감염원 차단 조치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2월 하순 31번 환자가 나오고 확진자가 급증한 시점부터는 입국금지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다는 쪽으로 대체로 의견이 정리됐다.
물론 의학적인 측면만 놓고 보면 중국인 입국금지 같은 이른바 ‘봉쇄전략’이 방역의 1단계로서 의미가 없는건 아니다. 인천국제공항과 국제여객선터미널을 폐쇄하고 모든 국민을 자가격리시켰다면 지역사회 감염을 막는데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현실에선 불가능하다. 게다가 중국인 입국자를 전면통제해도 중국에서 귀국하는 내국인을 막을 수는 없다. 국가의 존재 이유까지 부정하는 조치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한에 고립됐던 한국인 수백명을 국내로 데려와 2주간 격리하는 것만 해도 얼마나 힘든 일인지 충분히 목격했다. 중국봉쇄는 결국 중국인봉쇄가 아니라 중국에서 입국하는 한국인 봉쇄가 될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대응을 위해서 그렇잖아도 할일이 산더미인데 국가의 모든 역량을 거기다 쏟아붓는다면, 그건 아주 격식있게 표현해서 그냥 바보 멍청이다.
최원석 고려대 안산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코로나19 국내 확산 초기엔 입국제한 확대를 지지했지만 2월 초에 전화인터뷰할 때는 “지금 시점에선 의미없다”고 일축했다. 그는 “정책실패라거나 정부가 때를 놓쳤다고 보진 않는다. 우리는 의학적 판단만 얘기하지만 정부는 의학 뿐 아니라 외교 정치 경제를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방역과 감염병관리는 모와 도로 이뤄진 영역이 아니라 불확실성과 싸워야 하는 종합적인 판단의 영역이다.
현재 국내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코로나19는 중국인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이 주요 원인이었다. 중앙방역대책본부조차 방역대책의 초점을 확산차단(봉쇄전략)에서 조기발견과 조기치료, 인명피해 최소화(완화전략)로 바꿨으니 중국인 입국금지는 고려할 가치가 없다. 한국을 대표하는 다문화도시인 경기도 안산시에선 여지껏 확진자가 한 명도 안 나왔다. 국내 확진자 가운데 중국국적인 사람들의 동선을 유심히 보면 대림동은 없다.
좀 더 극단적인 비유를 들어보자. 조선시대 말기 강력한 쇄국정책을 폈을 때도 콜레라는 국내로 유입됐다. 콜레라가 조선에 처음 들어온 건 1821년(순조 21년)이었다. 원래 인도 풍토병이었다가 1817년 콜카타에서 본격 발병한 콜레라는 조선에서 100만 명 단위의 인명피해를 입혔다. 냉정히 말하면 쇄국정책에도 불구하고 콜레라가 들어온게 아니다. 국가의 역량과 책임성이 극도로 떨어져 제대로 대응을 못했을 뿐이다.
취재 때문에 인터뷰했던 전문가 가운데 이 문제에 관해 가장 분명한 입장을 밝힌 김창보 서울시 공공보건의료재단 대표이사는 이렇게 꼬집었다. “국경봉쇄는 북한이나 몽골처럼 방역에 자신 없는 국가가 취하는 수단이다. 외국인이 들어오는 속에서도 코로나19를 막는 게 일 잘하는 정부다. 음주운전을 막는다고 도로를 봉쇄하는 게 음주단속을 잘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중국인 입국을 금지하는 똑같은 논리가 우리를 입국 금지시키는 논리가 될 수 있다.” 이 우려는 1주일도 안돼 현실이 됐다. 이제 우리는 한국인 입국금지를 걱정하고 있다.
중국인 입국금지를 외치는 분들은 결국 대한민국을 무균실로 만들자고 외치는 꼴이다. 이건 중환자들에게 쓰는 처방일 뿐이다. 그럼 왜 자꾸 이런 허깨비 같은 얘기가 퍼지는 걸까. 먼저, 선거전략 차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정부를 비난하는 것 자체가 목표겠다. 이런 분들은 북한을 모범사례로 들며 따라해야 한다고 한다. 평소 종북척결에 나라의 운명이 걸린 것처럼 핏대를 올리던 분들이 종북발언을 서슴지 않는걸 보니 국가보안법 전문가는 다 어디 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봉쇄가 좋다는 분들이 신천지 발본 색원은 얘기하지 않는 것도 신기하기 짝이 없다.
좀 더 근본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그들’에 대한 경계감을 반영하는 게 아닌가 싶다. 세계사에는 ‘그들’이 가져온 재앙을 비난하고 ‘그들’의 음모를 폭로한다는 각종 헛소리가 차고도 넘친다. 1918년 처음 발병한 ‘스페인 독감’은 진원지였던 미국에서 “독일인 때문에 생겼다”, “동유럽 이민자 때문에 생겼다”, “흑인 때문”이라는 등 각종 소수자 혐오가 종합선물세트로 등장했던 걸로 유명하다. 일제 강점기 관동대지진 뒤엔 ‘이게 다 조선인들 때문’이란 유언비어가 퍼졌고 결국 집단학살극으로 번졌다. 19세기 콜레라가 한창일 당시 청나라에선 반체제 성향 신흥종교인 백련교도들이 우물에 독약을 뿌렸다는 식으로 유언비어가 난무했다고 한다.
‘이게 다 저들 때문’으로 시작하는 각종 음모론에서 참 재미있는 건, 음모를 꾸미는 주체는 언제나 ‘그들’이고, 그들이 노리는 건 언제나 '우리'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비밀조직’이라는 프리메이슨의 세계정복 음모부터, 유대인의 비밀세계정부, 외계인이 지구인을 납치해 생체실험을 한다는 등등. 구글지도에서 프리메이슨을 검색하면 전 세계 지부 주소와 전화번호까지 확인할 수 있다거나 외계인 생체실험 피해자는 죄다 미국인이고, UFO는 미국에서만 집중적으로 출몰한다는 등 합리적 의심이 끼어들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결국, 중국 어느 연구소에서 생화학무기를 개발하다 코로나19가 시작됐다는 얘기도 새로울 게 하나 없는 똑같은 레퍼토리일 뿐이다.
이게 다 ㅇㅇ 때문이다라고 책임을 떠넘기긴 쉽다. 10여 년 전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은 국민의 취미생활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입만 열면 ‘이게 다 미제의 침략책동 때문’이란다. 일부 할배들은 틈만 나면 ‘이게 다 종북좌파동성애자들 때문’이라고 외친다. 일부 극렬 문재인 지지자들은 ‘이게 다 적폐기득권세력 때문’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경험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건, 그런 짓 한다고 달라질 것도 좋아질 것도 없다는 게 아닐까. 차라리 누구라도 31번이 될 수 있다는 걸 인정하고 조금은 더 겸손해지고, ‘그들’에게 되도 않는 비난을 퍼부을 시간에 손이나 더 씻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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