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수라는 사람이 있다. 이 이름이 “해방 이후 최대 간첩”이 사용했던 가명으로 한국 사회를 뒤집어놨던 게 2003년이었으니 아직 20년도 안됐다. 하지만 지금 이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들 잊어버렸다. 세상엔 “해방 이후 최대 간첩”보다도 더 시급한 현안이 많으니까.
2022년 3월 13일 통일부가 운영하는 ‘북한정보포털’에서 김철수를 검색해봤다. 조선노동당 중앙위원, 채취공업상으로 나온다. “해방 이후 최대 간첩”이란 말은 어디에도 없다. 동일부나 국가정보원조차 김철수가 누구인지 잊어버린 것일까.
발단은 황장엽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최고위직으로 일하다 대한민국으로 망명 혹은 탈출한 황장엽은 1998년 6월 <북한의 진실과 허위>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이 책에서 독일 뮌스터대 교수로 일하던 송두율을 일컬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와 동일 인물이자, 독일의 한국인 유학생을 북한에 끌어들였던 북한 공작원’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 책은 국가정보원 산하 통일정책연구소에서 발간했다.
송두율은 그해 10월 황장엽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2001년 8월 서울지방법원 민사합의16부에서 ‘황장엽 주장의 명예훼손혐의는 인정하지만 손해배상 청구는 기각한다’고 판결했다. 명예훼손은 맞는데 손배배상까지 할 건 없다는 뜻인지, 명예훼손 맞으니까 손해배상 받는 건 참으라는건지 알다가도 모를 판결이었다. 그리고 이 알쏭달쏭한 판결은 2년 뒤 세계를 뒤집어놓는 소동의 한 빌미가 됐다.
송두율 일가족은 2003년 9월 22일 국내에 들어왔다. 1970년대 이후 유신반대운동과 통일운동 등으로 한국 정부에 미운털이 제대로 박히는 바람에 국내 입국을 못하고 있던 송두율은 그 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초청하는 형식인데다 국정원에서도 ‘자진출두하면 체포영장을 집행하지 않겠다’는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자 입국을 결심했다. 송두율은 귀국 다음날인 9월 23일 약속대로 국정원에 자진 출두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상황은 “모양새 갖춘 귀국(한국일보, 2003/09/22)”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때부터 상황은 송두율측이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국정원은 변호인 입회를 거부한데다 청와대와 주한독일대사관에는 변호인 입회중이라고 거짓 보고를 했다. 9월 24일 법무부는 송두율을 출국 정지시켰다. 국정원은 10월 1일 검찰에 송치했고, 검찰은 10월 21일 송두율에게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 10월 22일 법원 영장실질심사 후 구속영장이 발부되면서 송두율은 서울구치소에 입감됐다. 11월 19일 서울지검 공안1부는 송두율을 국가보안법 위반(반국가단체구성 등, 잠입⋅탈출, 회합⋅통신 등)과 사기 미수로 구속기소했다. 송두율은 독일 시민권자였고 독일에서도 인정받는 원로학자였다. 당연하게도 이 사건은 세계적인 뉴스가 됐다.
핵심 혐의는 김철수라는 가명으로 조선노동당 서열 23위 정치국 후보위원인 반국가단체 간부로서 지도적 임무를 수행했으며, 반국가단체 지역으로 잠입 탈출을 했고, 북한 당국자와 만남이나 대화 등을 통해 반국가단체 구성원과 회합통신을 했다는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2004년 3월 9일 검찰은 송두율에게 징역 15년을 구형했다. 법원은 3월 30일 1심 선고공판에서 주요 혐의를 모두 인정하면서 송두율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서울고등법원 형사6부는 항소심에서 “검찰이 제시한 증거로는 피고가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의심이 없지 않지만 증명력이 없다”며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저술활동을 통한 반국가단체 지도적 임무종사, 김일성 조문과 김정일에게 보낸 생일축하편지에 무죄를 선고했다. 다만 1991년 5월부터 1994년 7월까지 2년여 동안 5차례 방문해 김일성 주석 등을 만난 국가보안법상 잠입⋅탈출 혐의와 황장엽을 상대로 허위로 민사소송을 냈다는 혐의는 유죄로 판단했다. 대법원은 2008년 4월 17일 판결에서 독일 국적취득 이전의 방북을 뺀 국가보안법 위반 역시 모두 무죄를 선고해 고등법원으로 파기환송했다. 그 해 7월 24일 파기환송심은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5년을 확정했다.
송두율은 항소심 판결이 나온 2004년 7월 21일 석방됐다. 그는 곧이어 8월 2일 광주 망월동묘역을 참배했고 하루 뒤 고향인 제주를 방문한 뒤 8월 5일 독일로 출국했다. 그리고 그 뒤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솔직히 내가 그 입장이라고 해도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듯 하다.
“해방 이후 최대 간첩” 사건은 “분단국가의 이념적 기초와 실천을 담은(최장집, 2005: 77)” 규범인 국가보안법이 국내 뿐 아니라 전세계에 존재감을 각인시킨 가장 대표적이고도 전형적인 막장드라마였다. 송두율이라는 학자와 그의 사상을 법정에 세움으로써 한국사회는 그의 사상과 책을 불에 태우려 했고, 브레히트도 말했듯이 책을 태우는 자는 사람도 태울 수 있기 때문이다(송두율, 2003). 그러므로 송두율 교수 사건과 그 사건을 둘러싼 담론투쟁을 되짚어보는 것은 냉전반공주의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담론적 제도적 작동방식을 드러내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그런 마음으로 ‘송두율 사건’을 분석하는 논문을 썼다. 처음 쓰기 시작한게 작년 봄 무렵이었고 우여곡절 끝에 이번에 학술지에 논문이 실리게 됐다.
이 사건을 취재했던 처지에서 보자면 이 사건 자체도 충격이었고, 20년이 다 되도록 이 사건을 다룬 선행연구가 거의 없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김철수’가 버젓이 북한정보포털에 엉뚱한 이력으로 소개돼 있는 것도 충격이었다. 물론 가장 큰 충격은 송두율이 구속된 이후 정치권과 언론은 물론 말 그대로 우리 사회 전체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그를 잊어버린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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