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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사해/한반도-동아시아

남북과 50년 인연 몽골인 석학이 말하는 한반도 평화의 길

by betulo 2023.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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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명확한 전략과 기민한 전술로 한반도, 더 나아가 동북아 평화를 주도하길 바랍니다.”

몽골 외교관으로 서울과 평양에서 20년 근무하는 등 한반도와 50년 넘는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바산자브 락바(76) 전 몽골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략연구원 고문은 인터뷰에서 “당장은 남북간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고 있지만 정세는 변하기 마련”이라며 한국의 적극적인 전략수립과 주도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락바는 1974년부터 1982년까진 평양 주재 몽골대사관, 1997~2004년과 2006~2009년에는 주한몽골대사관에서 근무했다. 2015년에 ‘한반도평화통일연대 몽골 포럼’을 창설해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그는 “정전 70주년은 곧 분단 70주년이라는 걸 의미한다”고 짚었다. 그는 “특히 요즘은 남북 사이에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면서 “이북은 체제경쟁 자체가 불가능해지니까 통일정책 자체를 포기했다. 한국 역시 통일에 갈수록 무관심해지고 있다”고 안타까워다. 그는 “남북 긴장악화가 신냉전 구도와 맞물리면서 한반도 뿐 아니라 동북아시아 안보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면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은 동북아시아, 더 나아가 세계평화의 시금석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락바는 “1976년에 판문점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직전에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있어서 당장이라도 전쟁이 날 것처럼 분위기가 살벌했던 기억이 난다”면서 “1990년대에 판문점 남측 구역도 가봤다. 전쟁과 분단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실감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락바는 “정부간 관계가 경색됐을 때는 민간차원의 교류가 더 중요하다. 남북한 뿐 아니라 몽골을 포함해 국제사회에서 한반도 통일을 위한 다양한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그런 토대를 꾸준히 만들어가야만 국제적 공감대를 만들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언젠가 남북통일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남북은 냉전 종식 당시 결정적인 기회를 한 번 놓쳤다. 만약 확실한 국가 미래전략을 갖고 있었다면 달랐을 것이다”고 덧붙였다.

그는 “한국과 몽골 모두 지정학적으로 취약하다는 공통점이 있다”면서 “특히 중국의 영향력 확대에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강대국 사이에 둘러싸인 작은 나라라는 사실을 언제나 마음에 새기고 긴장을 늦추면 안된다”면서 “작은 나라의 외교정책은 기민하고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 국익을 중심으로 국가전략을 냉정하고도 명확히 세우고 그걸 바탕으로 정세변화에 맞춰 기민하게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반도와 인연을 맺은 계기는 무엇이었나.

“몽골국립대에서 몽골어과를 졸업한 뒤 외국유학생들에게 몽골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다 1972년에 문화교류 프로그램으로 평양에 가게 됐다. 외국에 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고 호기심으로 지원했다. 사실 몽골과 조선은 같은 사회주의 진영이라곤 하지만 몽골은 소련에 좀 더 가깝고 조선은 주체사상을 강조하다보니 교류가 그렇게 활발하진 않았다. 유학생도 몇년에 한번씩 몇명씩만 서로 교류하는 정도였다. 원래대로라면 김일성대에서 4년을 공부해야 했겠지만 당시 몽골 정부에서 ‘언어만 배우면 된다, 주체사상 배울 것 없다’고 해서 2년 과정이 됐다.”

-평양 생활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몽골에서 평양 가는데 사흘이 걸렸다. 울란바토르에서 아침에 기차를 타고 다음날 오후 베이징에 도착해 하루를 묵은 뒤 다시 평양 가는 기차를 타고 24시간 걸려 평양에 도착했다. 그때가 4월이었다. ‘쾌적하다. 몽골보다 기후가 좋구나’ 하는 게 첫인상이었다. 김일성대에선 우리를 위해 환영회를 열어 줬는데 당시 총장이 황장엽이었다. 교수님들이 정말 열심히 우리를 가르쳤는데, 말그대로 공부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외국인 기숙사에서 유학생들끼리만 어울려야 했고 학교밖으로 외출하기도 쉽지 않았다. 조선 학생들과 만날 기회도 거의 없었다. 외국인 기숙사에는 ‘동숙생’이라고 조선 학생이 있었는데 맥주를 몇 병씩 사다준다거나 해서 소소하게 챙겨주는 정도가 전부였다. 대사관 근무할 땐 아내와 딸을 데리고 갔다. 생활환경은 좋긴 했지만 많이 답답했다. 집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대사관이 있었는데 집과 대사관만 왔다갔다 했다. 평양 바깥으로 가려면 승인을 받아야 했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나마 각종 가족동반 행사가 있어서 금강산이나 묘향산, 판문점 구경을 할 수 있었다. 묘향산과 금강산은 정말 아름다웠던 게 지금도 기억난다.”

-평양에서 근무할 당시 김일성을 만난 적도 있다고 들었다.

“두 번 만나봤다. 조선노동당 당대회에 몽골대표단으로 갔을 때, 몽골대사가 신임장을 받을 때 배석했다. 당대회에선 평이한 말투로 미리 준비한 연설문도 없이 연설을 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신임장 받는 자리에선 신임 대사에게 담배를 권하면서 함께 담배를 피우면서 대화를 나눴다. 허스키한 목소리로 ‘1950년대 몽골에 간 적이 있는데 지금은 많이 변했지요? 다시 가보고 싶습니다’고 했다. 당시 몽골 국회의장이 주북몽골대사를 했던 적이 있어서 둘이 친하다며 안부 전해달라고도 했다.”

조선과 몽골 순방을 위해 1978년 6월 14일 평양국제공항에 도착한 모잠비크 대통령 사모라 마셀(왼쪽 두번째)이 마중나온 평양주재몽골대사와 악수하고 있다. 오른쪽 두 번째 안경 쓴 사람이 바산자브 락바. 맨 왼쪽에 김일성이 보인다. 바산자브 락바 제공


-한몽수교에도 역할을 했다.

“한국과 몽골이 1990년 3월에 수교했다. 당시 수교 준비단에 참여했다. 수교 서명 이틀 전에 한국 외교부 관계자들이 몽골을 방문했는데 당시만 해도 직항편이 없어서 서울에서 출발해 도쿄, 모스크바를 거쳐 오느라 비행기를 20시간 넘게 탔다고 했다. 1991년에 몽골국립대에 한국어과가 생기면서 교수로 일하다가 1995년에 단국대 몽골어과 초빙교수로 서울에 가게 됐다. 얼마 안돼 주한몽골대사관에서 일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직접 겪어본 남북을 비교해 준다면.

“1976년에 판문점 북측 구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직전에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있어서 분위기가 살벌했다. 1990년대 주한몽골대사관에서 일하면서 판문점 남측 구역도 가봤다. 전쟁과 분단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실감할 수 있었다. 남북은 일반인들은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많다. 남북 모두 부지런한한 것도 그렇고, 같은 민족이라는 건 숨길 수가 없다. 다만 사회체제가 다르니까 격차가 커지는 게 안타깝다. 1970년대만 해도 이북이 더 잘 살았는데 지금은 남북 경제력 격차가 하늘과 땅 차이가 됐다. 조선이 문을 닫아걸고 눈과 귀를 막고 살아가는 게 안타깝다.”


-남북간 군사적 긴장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한반도 문제는 한반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동북아시아, 더 나아가 세계평화의 시금석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상황이 계속 안 좋아진다. 조선은 사실상 통일정책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해는 간다. 남북한 경쟁 자체가 안되니까 통일을 하자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한국 역시 통일 자체에 무관심한 것 같다. 남북 긴장악화가 신냉전 구도와 맞물리면서 안보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조언을 해준다면.

“정세는 언젠가 달라지게 돼 있다. 계속 이런 식으로 갈 순 없다. 국익을 중심으로 전략을 명확히 세우고 그걸 바탕으로 정세변화에 맞춰 전술적으로 기민하게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 언젠가 남북통일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남북은 냉전 종식 당시 결정적인 기회를 한 번 놓쳤다. 만약 확실한 국가 미래전략을 갖고 있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한반도 평화통일을 지지하는 단체를 이끌고 있다.

“2015년에 ‘한반도평화통일  연대 몽골 포럼’을 창설했다. 현재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정부간 관계가 경색됐을 때는 민간차원의 교류가 더 중요하다. 남북한 뿐 아니라 몽골을 포함해 국제사회에서 한반도 통일을 위한 다양한 네트워크를 만들라고 조언하고 싶다. 그런 토대를 꾸준히 만들어가야만 국제적 공감대를 만들 수 있다.”


-몽골은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한국이 미중일러 4강에 둘러싸여 있는 것과 유사한 지정학적 환경이다.

“지정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국과 몽골은 꽤 유사하다. 강대국 사이에 둘러싸인 작은 나라라는 사실을 언제나 마음에 새기고 긴장을 늦추면 안된다. 특히 몽골은 면적인 남북한보다 7배 가량 크지만 인구는 약 340만명에 불과하다. 인구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낮다. 작은 나라의 외교정책은 기민하고 융통성있어야 한다. 큰 나라는 쉽게 움직일 수 없다. 작은 나라의 장점을 살려야 한다.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상하이협력기구를 예로 들면, 몽골은 옵저버로 참여하지만 정식 회원가입은 하지 않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에서 압력을 많이 받지만 우리 원칙을 지키고 있다. 1950년에 중국과 국경선을 확정했는데 당시 중국에선 ‘사회주의 형제국인데 천천히 하자’고 했지만 우리가 서둘렀다. 1962년에 국경문제로 중국이 인도를 침략해서 전쟁이 일어났는데 만약 국경조약을 체결하지 않았더라면 몽골도 중국 침략을 받았을 수도 있었다고 본다.”

-몽골에서도 중국 영향력 확대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중국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이 계속 커지고 있다. 2016년 11월 달라이 라마가 몽골을 방문하자 중국이 경제제재를 했는데 사드 배치 이후 한국이 당한 것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 몽골은 인구 대부분이 티베트 불교 신자다. 달라이 라마는 사회주의 시절인 1979년 몽골을 처음 찾았고, 2016년은 아홉번째 방문이었다. 하지만 중국은 무역은 물론 인적교류까지 끊어버리는 국경봉쇄로 몽골을 압박했다. 결국 2017년 2월 외교장관이 중국을 방문해 ‘다시는 달라이 라마를 초청하지 않겠다’고 백기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몽골의 국가전략은.

“사회주의 시절엔 사실 소련 따라하기밖에 없었다. 당초 중국공산당이 몽골을 중국 일부로 간주했기 때문에 소련의 지원이 절실했다. 몽골 남부엔 소련군이 주둔했다. 1990년대 민주화 이후 국가외교전략을 새롭게 정립했다. 미국, 유럽, 한국, 일본 등과 협력관계를 구축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지난 5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직후 몽골을 방문한 것에서 보듯 외교관계를 다변화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한몽관계 역시 2021년에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했다.”

김일성종합대에서 유학하던 1973년 바산자브 락바(왼쪽 네번째)가 불가리아, 헝가리, 러시아 등에서 온 유학생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바산자브 락바 제공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30725500204

 

[정전70주년] 남북과 50년 인연 몽골인 석학이 말하는 한반도 평화의 길

바산자브 락바(76) 전 몽골 NSC 전략연구원 고문 겸 ‘한반도평화통일연대 몽골포럼’ 사무총장, “한국이 명확한 전략과 기민한 전술로 한반도, 더 나아가 동북아 평화를 주도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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