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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염병의 밤은 지나가고

분노과잉시대

by betulo 2025. 2. 10.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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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령인지 개염병인지 모를 불면의 밤이 지나고, 두 달 가까이 속터지고 화나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어린 시절 고향엔 제대로 된 포장도로가 전혀 없어서 겨울이 끝날 무렵 눈이 녹으면 길바닥이 온통 진흙탕이 되기 일쑤였다. 그런 길을 걷다보면 차갑기 짝이 없는 얼음물이 신발 안으로 스며들곤 했다. 일단 괴롭고 상당히 짜증도 난다. 지난 두 달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지난해 12월 3일 윤석열이 계엄령을 선포하던 날 읽던 책은 하필 ‘헨리 키신저 리더십’이었다. 헨리 키신저라는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어쨌든 거장인 건 틀림없는 인물이 쓴 책이다. 세계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정치지도자 6명이 등장하는데, 독일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 싱가포르 총리 리콴유, 영국 총리 마가릿 대처 등이다. 키신저는 1923년생 아니랄까봐 이들과 나눴던 대화를 비롯한 뒷이야기까지 소개해서 꽤 흥미롭다.

키신저가 사망한 게 2023년이고 이 책이 국내에 번역된 것도 2023년이다. 그리고 나는 2024년 연말 이 책을 읽고 있었다. 엉터리 지도자가 나라를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만들 수 있는지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을까 싶다. 물론 나는 윤석열한테 단 한 번도 실망해 본 적이 없다는 걸 분명히 밝히고 싶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법이다.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진지하게 지도자의 자격과 자질, 지도력이란 주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지도자의 자질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건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했다는 한마디다.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명령하겠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불쌍한 아이크.”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후임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직전에 했다는 이 말은 훗날 아이크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아이젠하워 임기 8년을 상징하는 말이 돼 버렸다.

트루먼은 “나는 온종일 여기 앉아서 굳이 설득하지 않아도 알아서 일해야 할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시간을 다 보낸다…대통령이 가진 권력이란 그게 전부다”라는 말도 했다고 하는데, ‘대통령 리더십’의 본질에 대한 촌철살인이 아닐까 싶다.

트루먼이 했다는 아이크 이야기는 한국식 농담으로 바꿔보면 대대장은 유실수 심어라, 연대장은 무실수 심어라, 사단장은 잔디 깔아라 하는 군필자들의 오래된 농담이 생각나기도 한다. 아이젠하워 역시 미군 역사에 길이 남을 장군이었고, 또 그런만큼 명령하고 그 명령이 수행이 되는 데 익숙할 터. 하지만 대통령이란 그런 자리가 아니다.

하물며 군인 출신 대통령도 그런데 검사 출신 대통령이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한국에서 검사란 수사하고 기소하는 권력을 가진 유일한 집단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령유일체제라면 대한민국은 검사유일체제다. 윤석열 역시 검사 영감에 검찰총장까지 했으니 세상 무서울 게 없이 수십년을 살았을 터. 

위대한 마오 주석은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참새는 해로운 새다. 이들을 절멸시킬 수 없겠는가?(麻雀是害鸟, 能不能消灭它们)" 5년뒤 마오 주석은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참새는 더 이상 잡지 말고, 대신에 빈대를 잡자(麻雀不要打了, 代之以臭虫, 口号是‘除掉老鼠,臭虫,苍蝇,蚊子’.)."

마오쩌둥은 생전에 참새를 가리키며 “해로운 짐승”이라고 하자 중국 인민들이 모두 나서서 참새를 잡아 족쳤다고 하는데, 한국에선 검찰이 압수수색 영장을 들이밀며 “범죄자”라고 하면 그 순간 대한민국에서 범죄자 딱지를 벗을 길은 전혀 없다. 무죄판결을 받아도 벗어나기 힘드니 마오쩌둥 앞에 선 참새 꼴이 따로 없다. 하지만 그런 자세로 대통령 일을 하면 나라꼴이 어찌 되는지 우리는 지난 몇 년간 뼈에 사무치게 배워야 했다.

윤석열은 시종일관 ‘강력한 지도자’를 지향했다. 물론 대다수 대한민국 국민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바라마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를 되짚어 보면 강력한 지도자가 실제로는 취약한 지도자였던 사례가 부지기수다. 모든 의사결정이 V1 혹은 V0에게 몰리면 정부조직이 제대로 작동할 수가 없고, 모두가 V1 혹은 V0만 쳐다보며 복지부동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빈틈을 메꾸는 ‘문고리 권력’이 호가호위를 한다. 우리가 구속된 현직 대통령을 보면서 배워야 할 진짜 중요한 교훈이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백마 탄 왕자님은 필요없다’는 한마디 아닐까. 

인권연대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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